"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다"며 마음을 회색으로 칠해버린 이에게, 기대받고 기다려지는 존재라는 사실이 우리를 다시 밝게 물들입니다.
어느 날 아침, 회색 당나귀 슬로르의 몸에서 색깔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신비한 일이 일어났어요. 슬로르의 마음이 깊은 우울과 자기비하로 가라앉을수록, 회색은 점점 더 짙어졌고 몸은 희미해졌지요. "어차피 난 숲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니까..."
깜짝 놀란 그루뿌와 보니벨은 숲의 알록달록한 꽃잎과 알록달록한 과일들을 가져다 슬로르에게 칠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음의 색깔은 밖에서 강제로 칠한다고 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때 그루뿌가 슬로르 곁에 다가와 무심하게 툭 뱉었어요. "슬로르, 네가 어제 밤하늘을 보며 들려준 별 이야기가 정말 재밌었어. 오늘 밤에도 또 듣고 싶어. 기다릴게!"
이 작은 한마디가 슬로르의 마음에 닿는 순간, 슬로르의 귀 끝에서 아주 여린 분홍빛이 돌기 시작했어요.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며, 내 존재를 기대한다는 감각이 슬로르의 마음을 따뜻하게 지핀 것이었죠. 친구들이 저마다 다가와 "슬로르의 깊고 신중한 이야기가 좋아", "슬로르가 함께 있어 줘서 든든해" 하고 진심을 말해주자, 슬로르의 몸은 이내 따뜻하고 고유한 색깔들로 다시 차올랐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물들지 못하고 희미해질 때, 기억하세요. 당신의 목소리와 자리를 조용히 기다리는 이들이 곁에 있습니다.

